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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아동

영화속심리 아이 엠 샘

숀 펜이 중등도 정신지체 장애인을 연기한 <아이 엠 샘>은 감동적이다. 그는 전체 인구 대비 하위 1퍼센트에 해당하는 지능지수를 가졌지만,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않고도 알고 있는 사람 같아 매력적이다.

그러나 부모의 역할을 하는 데 있어 “사랑 밖엔 난 몰라도” 충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영화 보는 내내 회의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아이가 사랑만으로 크는 건 아니다. 물론 사랑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가 자라는 데는 그 외에도 두 개의 축이 더 필요하다.

나머지 두 축은 적절한 자극과 훈육이다. 중등도 정신지체인 샘은 루시가 어떤 종류의 자극을 받아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이 보인다. 그래도 아이가 갖는 어떤 내적, 외적인 힘에 의해 똘똘하고 사리 분별 분명하게 자란 건 천만다행이다. 사실 사랑도 그렇다. 맹목적으로 쏟아 주는 정서적 헌신 뿐 아니라, 시와 때와 아이의 요구에 맞는 돌봄의 기술도 필요한 것이다. 예컨대 기저귀가 축축해지면 갈아 주고, 적당한 양을 먹이고. 그런데 샘은 그것 조차 제대로 못한다.

교육적인 것에 이르면 더 말할 나위 없다. 언제까지 루시가 일곱살 짜리 쉬운 책을 읽는 것으로 충분할까? 실제로 일곱 살이 넘으면서 루시는 더 이상 배우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한다. 아이가 적극적으로 학교를 거부하는 건 일종의 응급상황이다. 누군가 거기 개입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게다가 샘은 조금만 불안한 상황이 와도 쉽게 초조해지고 어쩔 줄 모르고 같은 말과 행동을 반복한다. 두 가지 상황, 예컨대 커피를 만드는 일과 법정에 가야 하는 일이 동시에 생기면 인지적으로 그것을 순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 커가는 루시를 감당하는 건 그에게 시시때때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과 불안한 상황들을 안겨줄 것이다. 사실 생각만 해도 당황스럽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비단 샘 부녀(父女)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마이너리티, 즉 경제력과 지적 융통성과 주변의 인적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이들이 안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 실수를 반복하는 2급 정신지체 장애인을 적은 임금을 줄 지언정 8년 동안이나 근속케 해 줄만한 직장도 실제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을지 모른다.

샘을 둘러싼 사람들, 작은 자조그룹을 이룬 그들은 어떤 면에서 참 아름답다. 비틀즈 멤버들이 애비 로드를 걸어가는 모습을 따 온 장면에서도 느껴지듯이, 소극적이지만 나름대로의 목소리로 세상과 소통한다. 그들은 샘과 루시를 사랑하고, 도와주고, 법정 싸움에도 함께 참여하지만 때로 그 노력들은 매우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정작 필요한 것은 더 세상사에 밝고 소위 똑똑한 사람들, 말하자면 변호사 리타나 루시의 위탁모와 같은 사람들이, 샘과 루시가 함께 사는 과정에서 아이를 제대로 교육하고 기르도록 기꺼이 역할을 나눠 맡아 주는 일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루시는 결국 커가면서 능력이 모자란 아버지를 돌봐 주어야 하는 아이(parenting child)가 되어, 결국 채워지지 않았던 의존욕구 같은 것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 분노처럼 쌓아 두고 살아가야 할 지 모른다. 영화를 보며 끝없이 감동만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렇게 양육의 짐을 나누어 맡는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유희정(정신과 전문의/경상대병원 소아정신과) <아이 엠 샘>을 통해 본 부모 되기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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